김종직의 시 한 수, 역사를 뒤흔들다
조선 시대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사건 중 하나가 '사화(士禍)'입니다. 특히 그 첫 번째이자 가장 상징적인 사건인 '무오사화(戊午士禍)'는 한 문인의 글에서 비롯된 비극이었습니다. 오늘은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에 기록된 김종직(金宗直)의 ‘술주시’ 화답문 사건을 통해, 단어와 은유가 얼마나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는지를 살펴보려 합니다.
술주시와 도연명, 그리고 탕동간
김종직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성리학자였으며, 후일 많은 사림들이 사표로 삼을 만큼 사상적으로 영향력이 컸습니다.
그가 쓴 ‘술주시 화답문’은 단순한 문학적 창작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중국 진나라 말기의 도연명이라는 시인의 작품인 「술주시」에 화답하며, 탕동간이 덧붙인 주석을 바탕으로 깊은 의미를 덧입혀 새로운 해석을 내놓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나는 젊어서는 이 시의 뜻을 몰랐으나, 탕동간의 주석을 통해 비로소 이것이 영릉을 애도한 시임을 알았다… 유유의 찬탈은 폭로되어야 하며, 나의 시는 난신적자들이 두려워할 것이다.”
이 구절은 실로 무시무시한 뜻을 품고 있었습니다. 유유는 진나라 공제를 찬탈한 인물로, 여기서 김종직은 **세조(수양대군)**를 그에 빗댄 것입니다. 곧바로 문제가 터졌습니다.
실록에 담긴 긴장: “차마 말할 수 없습니다”
실록에 따르면 이 화답문을 본 조정 대신들은 충격을 감추지 못합니다.
윤필상, 한치형 등의 대신들은 "조의제문보다 심한 표현이 있다"고 보고하며 그 뜻을 해석해 올립니다.
“영릉은 곧 노산(魯山)을 빗댄 것이요, 유유의 찬탈은 세조를 지목한 것입니다.”
“후세 난신적자가 나의 시를 보고 두려워할 것이다”라는 부분은 《춘추》를 빗댄 말로 해석됩니다. 이는 맹자가 말한 “춘추가 쓰이자 난신적자들이 두려워했다”는 구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런 설명이 이어지자 연산군은 격노합니다.
“어찌 세상에 이럴 수 있단 말인가? 그의 제자들까지 전부 추궁하는 것이 어떠한가?”
글 한 편이 사람을 죽인다: 무오사화 발발
이 사건은 결국 무오사화의 도화선이 됩니다.
김종직의 시를 문제 삼으며, 그의 문하에 있었던 김일손, 유자광, 정여창 등 수많은 사림들이 탄압을 받았습니다.
이들 중 일부는 처형되었고, 일부는 유배나 파직당했으며, 김종직 본인도 사후에 부관참시를 당하게 됩니다. 이 사건은 단순한 문학적 해석을 넘어, 조선 조정의 사상적 대립 — 즉 훈구파와 사림파의 충돌이라는 구조적 갈등을 수면 위로 드러낸 사건이었습니다.
정치와 문학의 경계는 어디인가?
이 글을 읽으며 떠오른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과연 문학은 정치와 얼마나 가까울 수 있을까?’
김종직의 글은 직접적인 정치 비판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은유와 상징을 통해 권력자를 지목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는 사후에 죽임을 당했고, 제자들까지도 연좌의 고통을 겪었습니다. 이는 권력이 문학의 힘을 얼마나 두려워했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조선 시대 ‘말’의 무게를 절실히 느끼게 합니다.
조선왕조실록, 살아 숨 쉬는 정쟁의 기록
이번 사건은 조선왕조실록 중에서도 연산군일기에 기록된 부분입니다.
연산군일기는 조선왕조실록 중에서도 가장 격정적이고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건들이 다수 기록되어 있는 파트입니다. 특히 연산 4년 7월 17일자 기록은 단 하루의 기록이지만, 김종직의 화답문이 어떤 의미였고, 조정이 얼마나 빠르게 탄핵과 숙청으로 이어졌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은유의 시대, 비판의 기술
김종직이 사용한 은유, 풍자, 비교는 단순한 시적 기교가 아닙니다.
그것은 당대 정치 현실을 직면하지 못했던 사림의 저항 방식이었고, 동시에 독자들에게는 해독을 요구하는 퍼즐과도 같은 메시지였습니다. 지금 우리가 SNS나 칼럼, 블로그에 쓰는 문장들도 어쩌면 누군가에겐 그 시대의 ‘술주시’일 수 있습니다.
무오사화를 다시 바라보며
‘김종직이 그 시를 쓰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그의 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더라면?’
아마도 조선의 정치는 조금 더 느리게 흘렀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가 남긴 글은 수백 년 뒤를 사는 우리에게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당신은 말할 수 있는가?”
김종직은 결국 글로써 죽었지만, 그 글은 살아남아 조선 정치사의 중요한 페이지를 장식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우리는 그 한 줄 한 줄을 다시 읽으며, '글'의 힘과 '말'의 무게를 되새기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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